박상순 시인, 출판편집인 |
6은 나무 7은 돌고래, 열 번째는 전화기
첫 번째는 나
2는 자동차
3은 늑대, 4는 잠수함
5는 악어, 6은 나무, 7은 돌고래
8은 비행기
9는 코뿔소, 열 번째는 전화기
첫 번째의 내가
열 번째를 들고 반복해서 말한다
2는 자동차, 3은 늑대
몸통이 불어날 때까지
8은 비행기, 9는 코뿔소,
마지막은 전화기
숫자놀이 장난감
아홉까지 배운 날
불어난 제 살을 뜯어먹고
첫 번째는 나
열 번째는 전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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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정끝별
말문이 트인 아이는 어느 날 선언하다. “엄마, 오늘부터
엄마는 아지, 아빠는 끼리, 언니는 콩콩이, 나는 밍밍이야, 이
제 그렇게 불러야 돼, 꼬옥.” 또 어느 날은 이렇게 선언한다.
“이제부터 식탁은 구름, 의자는 나무 밥은 흙, 반찬은 소라라
고 해야 돼, 알았지?” 황당 난감 그 자체일 때가 많은 박상순
시인의 시는 이런 네 살배기 놀이의 사유로 들여다보았을 때
쉽게 이해된곤 한다. 그러니 주의하시라! 그의 시를 향해, 이
게 무슨 말이지 하고 묻는 순간 당신은 허방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니,
이 시는 'A는 B'라는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A와
B의 관계는 무연하고 또 우연하다. 인과관계가 없는 ‘관계
맺기’ 혹은 ‘이름 바꾸기’ 놀이다. 그러니 왜 첫 번째가 나이
고 6이 나무이고 7이 돌고래인지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독
자들도 A 혹은 B에 마음껏 다른 단어를 넣어 읽어도 무방하
다. 또한 이 시는 앞에는 숫자가, 뒤에는 낱말이 새겨진 아이
들의 카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6이라 쓰인 카드의 뒷면에
는 나무라고 씌어 있고, 7이라 쓰인 카드의 뒷면에는 돌고래
라고 씌어 있다. 십진법에 따르면 세상의 모든 숫자는 1부터
10까지의 숫자로 환원된다. 열 번째에서 시가 끝나는 이유다.
숫자와 낱말의 관계도 무연하고 우연한 약속에 불과하다면,
현실과 언어의 관계가 그러하고, 세상의 모든 관계도 그러하
다는 것일까?
이 시의 핵심은, ‘내’가 이 순서와 관계를 (외우듯) 반복
하는 그 리듬에 있다. ‘자, 아무 생각말고 따라해 봐.’ 라는 식
의 폭력적인 우리의 교육 현실 혹은 성장 과정을 암시하는 것
일까. 매일 반복되는 단조로운 일상 내지는 언어(혹은 제도)
의 감옥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일까. 아니면 유년의 로망
이 담긴 단어의 나열이라는 점에서 유년의 향수를 담고 있는
것일까. 아무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니기도 할 것이다. 언뜻 보
면 천진난만한데 읽다 보면 슬쩍 공포스러워지는 까닭이다.
박상순 시인은 회화를 전공한 미술학도다. 유능한 북(표
지)디자이너이자 편집자이며 출판인이기도 하다. ‘무서운 아
이들’의 유희적 상상력, 신경증적 반복, 파격적인 시 형식, 의
미의 비약적 해체를 특징으로 하는 그의 시에 대해 다 알려고
하지 말자. 다 알려고 하면 박상순 시는 없다. 박상순보다 시
를 잘 쓰는 사람은 많을지 모르지만 그 누구도 박상순처럼 시
를 쓰지는 못한다. 그게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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