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향기.13]
흙
박 상 순
흙을 주문한다. 한 상자. 밀봉된 흙덩이가
상자에 담겨 트럭에 실린다.
다리를 건넌다, 비 내리는 거리를 달린다.
창가에 항아리가 갈라지며 웃는다.
웃으면서, 뭐라고, 뭐라고, 이야기한다.
웃는 병에 걸린 이야기.
이야기 병에 걸린 웃음.
갈라진 항아리가 웃는 동안, 한 상자.
웃는 병에 걸린 이야기를 웃음소리로 이야기하는 동안, 한 상자.
주문한 흙이, 새들이 훑고 간 웃음 사이로 온다.
이야기 병에 걸린 비의 허리를 자르며 온다.
한 상자. 흙이 온다. 무릎을 꿇고
두 팔로 몸을 짚은, 가슴이 두 쪽으로 갈라진 내가
이렇게, 너를 바라보는 동안 흙이 온다.
너에게 뿌릴 한 상자의 흙이 온다.
이제 너를 덮을 흙이 내게로 온다.
손가락이 아프다. 왼쪽 끝.
손가락 끝이 아프다. 한쪽 끝.
등단: 현대문학
게재지: 1991. 작가세계
출처 : 계간 시향
글쓴이 : 오혜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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