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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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녀도는 김동리의 불행한 유년기의 원초적경험을 인간비극의 보편적 문제로 끌어올린 개인사적 작품들(무녀도, 등신불, 을화, 목수요셉, 사반의 십자가, 부활 등)의 선상에 있다. 극한의 고통을 겪는 인간이 살낱같은 희망으로 알고 매달리는 신성에 대한 연구(무교,기독교,불교),그리고 젠더(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연구는 인간이해의 필수적인 이슈로써 당연히 요청될 것이다.
서은주교수에게 묻고 답함
서은주교수의 '신성과 젠더'에 관한 논문을 읽고 평정하던 시인의 마음에 서너 개의 파문이 일었다. 시인이 가장 좋아하는 한국소설 무녀도를 다루었다는 사실에의 기호당김이 있었고, '신성과 젠더'라는 성과 속, 남성성과 여성성,혹은 절대적 구원의 문제를 내재적 주제로 풀어낸 점일 것이다.
첫째, 성과 속의 경계에 있는 실존을 건 사투이며 자신의 정체성의 실험이라는 언어적 표현으로 소설속의 어떤 부분을 구체적으로 지적하는가 하는 의문인데, 오히려 본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된 읽기속에서 성과 속의 상호간섭적인 침투 속에 분리할 수 없는 성과 속을 느꼈기 때문이다.
둘째, 종교를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로 본다고 하면서도, 인식을 구하는 욕구를 욕망 그 자체로 환원하여, 성스러운 종교지향을 속된 자아의 갈등으로 끌어내리는 느낌을 받았다는 점이다. 이야기의 주요골격인 종교적 대립을 이론적 정합성을 갖춘 종교이데올로기에 대한 검토를 더 면밀히 살폈으면, 김동리의 사상( 남성의 신성)을 더 잘 이해 하고 작품읽기에 더 성실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세째, 마지막 장에서 무속을 인간의 힘과 의지로 비하하는 비이성적 가치로 보고,기독교를 신 중심의 합리주의에 가치적으로 미치지 못한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과연 그 때 당시 나 다운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 말했던 김동리의 전통 회복의 노력이 세계적인 인류애를 내세우는 기독교 합리주의에 미치지 못하는 것 이었을까
네째 모화의 윤리적죄의식은 없다. 신령님의 계시가 살아있는 몸짓이 된 신이 된 모화는 근본적으로 기독교적인 원죄의식을 들이댈 수 없는 자연 그 자체, 대지의 자기정당성으로 보아야 한다. 근본적으로 불안하고 회의적인 남성성이 닿지 못하는 숭고한 육체를 지닌 신성의 담지자로, 자기분열적인 도시성이 이르지 못하는 완전한 자연으로 보아야한다. 물활론적 배경은 곧 자기자신이기 때문이다.
내가 읽은 무녀도
무당 모화는 정령들이 살아있는 물활론적인 배경의 퇴락한 집에서 ,불도를 배우라고 절로 떠나보낸 욱이가 집을 떠나 죽음에 이르는 여행 이후, 기독교인이 되어서 돌아온 사실을 감당할 수가 없다. 생과 운명의 주재자를 천지신명으로 보고 신명의 점지로 생업을 잇는 모화에게, '세상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라는 욱이의 말은 천지가 뒤집힐 소리이다. 아들이 잠든 사이 성경책을 불 태우는 행위는 사랑하는 아들을 파괴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가 믿는 절대적 신의 세계로 복귀시키기 위함이다. 한밤중에 정지에서 촛불을 켜놓고 굿을 하던 그녀에게서 성경책을 빼앗으려 몸부림치다가 불이 확 번져 기둥에 불이 옮겨 붙고 욱이가 칼에 찔리는 사건은 -근친상간적 몸싸움의 유사태로 읽혀진다. 결과 상처입은 욱이는 외인선교사에게서 성경책을 받아 들고 죽음에 이른다. -이는 상징적으로 해독하자면 어머니와의 갈등 속에 어머니를 여자(성애대상)로 보는 시련을 이겨내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어머니의 권위(인격적 대상)를 인정함을 뜻한다.
또한 용소에서 혼을 부르는 마지막 굿에서 딸이 입을 열 것이라고 호언장담을 하는데 신의 경지에 몰입되어 서서히 소용돌이치는 물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모화의 죽음을 댓가로 딸은 극적으로 말문을 연다. 아비가 몰고온 나귀를 타고(예수의 나귀), 성경을 들고 떠돈다(깨달음의 전파). 이렇게 무당 모화의 죽음은 그늘에 가려진 딸이 생명을 되찾아 입을 열고 세상을 향해 자기를 나타내게 함을 의미함이니, 붓으로 모화의 신성을 재생하고, 그녀의 거룩한 희생을 기억하며 영원성의 틀 안에 모심(무녀도)을 의미한다.
젠더와 신성의 배리적 가치전승
젠더에 따라 신성이 다르게 발현됨은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다. 모화가 퇴락해 가는 낡은 집 주위에서 초자연적인 숭배와 도취와 몰입을 자기의 힘과 의지를 깨달고 실현한다면, 욱이는 집으로부터 떠나 죽음에 이르는 기인 여행을 하고 성경책을 들고 사반의 십자가를 지면서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를 얻는 것을 볼 때. 이렇게 초자연성이 다르게 발현됨은 남성성과 여성성 생물학적인 차이 때문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여기서 예수의 부활을 신성으로 쉽게 못 받아 들이는 김동리의 고뇌가 있는 것이다.
신성의 내용성에 대한 의문을 더 파고 들어 보자. 무속은 서구 합리주의 아래 성장한 기독교에 비해, 소박한 자연유기체적 삶속에서 체득한 신성이 공동체를 함께 하는 부족들의 이성이 되고 고통에 처한 삶의 치유의 가르침과 힘이 된다. 그것은 문화적 차이가 될 지언정 열등함이 될 수 없으며. 토착민들에게 너무나도 타당한 치유의 원천이 되어 왔다. 그러나 외세속에 저열한 것으로 떨어져 자기자리를 잃곤 하였다. 그러나 거미줄쳐진 퇴락한 집에 사는 무당 모화는 과거를 향해 절대적 구원의 손길을 내뻗고, 그녀로 하여금 수직의 전승적인 한줄기 빛을 잡고 어둠뿐인 이 땅에서 일어서는 힘을 갖게 한다.
그렇다면 종교적 이데올로기의 대립은 죽음에 이르는 도그마가 될 수 있는가 ? 무교는 한국고유의 전통사상의 뿌리를 갖고 있다. 비록 겉으로는 불교와 유교가 지배한 것처럼 보일 지라도 신라 고려 조선을 관통하는 하부구조를 지켜온 정신적인 에너지이다. 가장 한국적이고 가장 토착적인 무속을 지켜온 그들이 이땅의 하늘에서 기운을 직통으로 받고 이 땅의 선조들과 가장 가슴이 잘 통하는 영이라 한다면 과할까?
삶의 의미의 절대적인 근거으로 천지신의 모시는 모화에게는 '이 세상을 내가 지었노라' 선포하는 기독의 하나님을 배척할 수 밖에 없는 자기권능이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나라지킬 힘을 잃고 식민지가 된 조국에서 박해받는 백성을 구해줄 유일한 힘은 미국의 선교사가 가져온 빵과 성경에서 나온다. 불도를 배우러 간 욱이가 가만히 앉아서 주장자만 휘두르는 불교선사를 죽이고(36년 원작,개작에는 없음), 사반의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 술취하고 폭행하는 아버지로부터 구원을 얻는 길이 곧 식민지 아버지 부재의 부성을 회복하는 길이다. 이 때 욱이의 절대신인 하나님과 모화의 천지신은 충돌할 수 밖에 없다.
상식적으로 아들을 살리기 위해 자기를 버리는 모든 한국의 어머니와 달리 아들을 죽이고 저를 살리는 어머니 무당모화는 자기 안에 내재된 자연사랑을 닮은 신성으로 바깥의 적(이웃의 모략, 벙어리딸, 예수장이아들)을 물리치는 힘과 의지로 표상되는 데, 아들이 신에게 의탁한 인간이라면, 모화는 곧 신이 된 인간을 의미한다. 이 드라마는 죽음의 극이 아닌 생명의 극이다. 욱이의 죽음은 주정뱅이 아버지를 극복하고 말씀이신 하나님을 받아드림을 의미한다.
대모신
외세의 힘에 밀리는 토착신을 지키려고 몸부림치는 모화는 제주의 창조신 설망대할망이나, 지리산 반야봉에 사는 마고할미, 2월 영등제의 영등할미, 바리공주, 삼신할미같은 이 땅의 고유한 대모신이다. 용왕님이 아버지이자, 어머니가 되는 것처럼, 대모신은 자기 몸안에서 나온 것을 지키려는 어미의 맹목적이면서도 숭고한 몸짓으로 성속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생명의 땅을 되찾으려는 기찬 기도가 된다.
이같이 모화의 승리는 수직으로 전승되는 것에 대한 믿음이다. 영혼이 상통해야 상생할 수 있는 천지인의 세계에 거짓없는 상신의 세계로 나아가려는 진정성이 넘치는 몸짓이다. 신의 경지에 이르른 춤사위는 뼈도 살도 없는 춤으로 묘사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신에게 휘둘리던 인간들은 죽고, 성경과 예술을 통해 다시 태어난 인간들이 다시 신을 살려 내는 기적을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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